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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만화의 오래된 미래

기고

스콧 맥클라우드 초청 토크쇼 발제문
웹툰: 만화의 오래된 미래

 
 

 

 

선우훈
  

 

1. 왜 우리는 만화임을 부정함으로써 만화의 가치를 말할까?

 “이것은 만화가 아니다.”
이 문장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익숙한 표현을 더해 보자.

“이것은 만화가 아니다. 예술이다.”
두 문장이 함께할 때 비로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해진다.

“만화가 아니”라는 표현은 만화에 칭찬으로 쓰인다. 적어도 웹툰의 댓글란이나 책 광고에서만큼은 그렇다.

웹툰 <미생>의 단행본 광고 문구는 “이것은 만화가 아니다. 인생 교과서다.”이고, 웹툰 <송곳>의 단행본 광고 문구는 “이것은 웹툰이 아니다. 인생이다.”이다.

제시된 문장들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공식은 이러하다.

 

 

‘만화 ≠ 인생 = 예술

 

 

왜 우리는 만화임을 부정함으로써 만화의 가치를 말할까? 이 공식을 넘어 예외로 인정받을 수 있는 뛰어난 작품만이 예술이 되고, 인생(의 교과서)이 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위 공식에서 인생과 예술은 정량화될 수 없는, 독자적이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무엇으로 상정된다. 그 세계에는 비판도 비난도 없으며 오로지 감탄만이 존재한다.

좌표와 정도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만화가 인생이나 예술에 빗대지는 상태란 0 아니면 1, 만화이거나 만화가 아닌 세계다.

이 공식은 사실 성립하지 않지만, 널리 퍼진 인식인 만큼 더 적극적으로 왜 성립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인생’은 수사적 표현으로 용인될 수 있겠으나, 적어도 ‘예술’이라는 단어는 더는 수사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 만화 또한 예술인지’를 역설할 필요도 없다. 만화는 이미 예술이기 때문이다.

 

 

‘만화 ∈ 예술 좋은 것 and 나쁜 것

 

 

‘예술’은 언어적 분류일 뿐이다. 거칠게 정의하면, ‘감상을 전제한 창조 행위, 또는 그 작품’을 뜻한다. ‘예술’이라는 명명은 결국 수많은 인간의 활동과 그 결과물 중 일부를 카테고리로 묶은 것이다.

이러한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가치 표현으로 쓰고 있는 것은, 어떤 편견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 그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오직 좋은 예술만이 좋은 것이고, 위대한 예술만이 위대하다.

 

 

2. 만화가 예술이므로, 당연히 작가와 작품에는 수준 높은 비판과 비평이 뒤따라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만화에 대한 전통적인 의식과 편견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만화가 오랜 기간 프로파간다로, 기술로, 도구로, 또는 유해 매체로 오해와 멸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야 누리게 된 예술로서의 지위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결론이 달라야 한다.  이제 우리는 0과 1뿐인 세계를 떠나, 좌표와 정도 차이에 대해 더 자세하고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나는 모든 작가의 노고를 존경한다. 특히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때문에 '힘들 테니까 좋은 얘기만 하자.'는 주장만큼 작가들을 욕보이는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만화가 예술이므로, 당연히 작가와 작품에는 수준 높은 비판과 비평이 뒤따라야 한다.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고 하는 의견이야말로 작품을 낮춰보는 것이다. ‘만화’는 더 이상 열등한 무엇이 아니다.

웹툰의 시대가 열리며, 만화는 공공의 영역에 진입했다(그 덕분에 만화의 지위와 위상도 순식간에 변화를 맞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웹툰이 만화이고 만화가 예술이라면, 우리는 그에 걸맞은 질문을 갖고 있는가? 또는, 답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준비를 하는 것이 실제로 만화를 예술로 만드는 유일한 길 아닐까?

두말할 것 없이, 한국의 웹툰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비평이 그에 준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는지는 의문이다. 학계의 연구가 출판만화 시절부터 명맥을 이어왔으나, 대중문화의 비평 지형으로서 대중과 함께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매체나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년간 끊어졌던 만화평론가의 정식 등단 경로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그런 공간에 대한 시도는 계속 되어왔고, ‘웹’의 생태계를 체험하며 성장한 신진 평론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만화비평 웹진 YOUR MANA는 그 시도가 새롭게 이뤄지는 공간이다. 웹에서 생활하는 이들과 함께 ‘웹툰’을 통해 만화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으려 한다.

이러한 시작에 발맞춰, 1993년 <만화의 이해> 출간으로 만화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고, 2000년 <만화의 미래> 출간으로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스콧 맥클라우드를 초청, 토크 자리를 마련한다.

또 1995년 등단 이후 지금까지 한국만화의 비평 지형을 책임지다시피 한 박인하 평론가도 초청했는데, 이 토크를 진행하게 되어 큰 영광이다. 웹툰과 함께 자란 세대로서, 이 자리에 마땅한 질문들을 던져본다.

 

3. 만화라는 예술이 제시하는 내일의 밑그림은 과거의 비전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발견될 것이다.

 

3-1. 이제는 웹-지면의 연출 이야기를 떠나,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콘텐츠 소비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 윤태호가 말했듯, ‘포털로 시작해서 포털로 끝나는’ 우리의 일상은 웹툰 시장 확장의 원인이기도 하다. 스콧 맥클라우드의 저서 ‘만화의 미래’에서 예견된 웹-만화의 미래상은 한국에서 포털을 통해 다수의 편의를 따르는 형식이 고정된 상태다.

그래서 이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가상공간을 둘러싼 ‘역학’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선은 웹툰의 성립 배경인 ‘웹’을 지면의 연장으로 해석하는 대신, 공간으로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3-2. 스마트 디바이스의 등장이 ‘만화’ 담론 내부에 미칠 영향은 어떠한 것일까?

웹은 우리의 생활이 이뤄지는 정보의 제공처이자 유통망이며, 의견 수렴의 장이자 소통망이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손바닥만 한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해서 실제로 PC 화면과는 물리적 차이가 있는, 주머니 속의 두께 없는 ‘공간’으로 거듭나기까지 했다.

이제는 누구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만화(웹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만화가 걸어 다니며 볼 수 있는 매체의 특징을 띠게 되었다.

 

3-3. 소규모 노동 집약 창작 행위의 결과물인 만화는, 앞으로의 세계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될까?

인터넷 게시판의 이미지와 댓글 서사는 정지된 이미지의 나열로 이루어진 웹툰과 댓글을 통해 정제되어 제공되는 산업으로 확장되었다.

여기에 시간 축이 더해진 것이 아프리카 TV의 개인방송과 실시간 댓글 문화 아닐까? 그렇다면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TV 프로그램 역시 이러한 실시간 댓글과 게시판의 주인을 공공의 영역으로 정제하고 전파한 것(포털 웹툰에 비견할 만한 존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SNS를 통해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생중계를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 부르고, 토론은 인강으로, 후원금을 별풍으로,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정보 취득을 덕질이라 부르며 습득된 인프라 구조를 통해 다시 현실을 학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웹툰은 이미 우리 삶의 프레임에 일조하는 콘텐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만화의 오래된 미래’인 웹툰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서, 마지막 질문을 바꿔보자. 1인 가구의 구성 비율이 늘어나고 1인 창작 콘텐츠가 빠르게 소비되는 지금, ‘연속적으로 정지된 상들의, 시각 소통체계의 예술(comics)’은 과연 어떤 역할과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이번 2016년 부천국제만화축제 초청 토크에서 만화의 오래된 미래, 웹툰의 현재를 다시 조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화라는 예술이 제시하는 내일의 밑그림은 과거의 비전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발견될 것이다.

 


선우훈 편집장, 만화평론가, 만화가. 다음 웹툰에서 <데미지 오버 타임>을 연재했다.

 
 
 

 

 

YOUR MANAⒸ선우훈